절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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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재의 詩詩한 이야기]

-김수영, <절망> <사랑의 변주곡>
-세사르 바예호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비닐 커버가 씌워진 김수영(1921~1968)의 《거대한 뿌리》를 책꽂이에서 뽑는다. 고등학생 시절에 산 시집이다. 활자로 눌러 찍은 티가 나는 글씨, 풀리지 않는 언어들과 함께 나의 한 시절은 갔다. 《김수영 전집》도 펼쳐본다. 특히 산문편은 감격하고 반성하며 읽었던 책, 읽으면 생각이 구름처럼 일어나던 책, 그래서 단숨에 못 읽고 아껴가며 읽었던 책이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 싶으면 다시 김수영을 읽게 된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먼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 <절망> (1965. 8. 28) 전문

▲ 시인 김수영

50년 전 김수영에게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절망이란 무엇이었을까. 1960년엔 그를 가슴 벅차게 만들었던 4.19가 일어났으나, 몇 달 후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먼 곳에서부터/먼 곳으로/다시 몸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고 말했다.

“5.16 이후의 나의 생활도 생활이다/복종의 미덕!/사상까지도 복종하라!”(<전향기>)라며 야유하기도 하고,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며 반항의 옹졸함을 반성하던 시인은 급기야 “이제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다”(<말>)라며 좌절한다.

김수영에게는 시대가 절망이었고, 같은 시대를 살면서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절망이었고, 그 절망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이 절망이었을 것이다. 절망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희망의 끊김이다. 개념적으로는 희망이 먼저 정의된 후에야 절망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디폴트 값’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으로 설정돼 있다. 희망은 절망의 바다를 항해하는 인간이 우연히 맞닥뜨리는 무인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절망>의 마지막 행은, 절망이 스스로 반성을 하고 사과를 하고 희망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힌다. 희망은 절망이 어떻게 하는가와 무관하게 “먼 데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의 반성을 기대하고 상상해낸 희망은 달콤한 거짓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희망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정직하게 절망을 견디는 일밖에 없다.

졸렬과 수치와 절망을 견디고 있던 김수영에게 “먼 데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희망이 찾아온 때가 있었다. 희망은 현실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판단 혹은 믿음이다.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현실이 언젠가는 바뀔 것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사랑’을 통해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노래한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狂信)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중략)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1967. 2.15) 마지막 연

김수영은 “복사씨와 살구씨가 (…)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을 보지 못하고 이 시를 쓴 다음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세대 중에는 80년대에 그런 날을 경험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이 느꼈던 4.19의 환희가 곧 환멸로 변했듯이, 그들의 희망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김수영의 희망’ 역시 그가 마지막에 미심쩍어했듯이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었을까.

희망은 시로 노래할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는 세상을 끝까지 의심하는 형식이며, 시인은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원래 인간의 의문에 대해 종교가 내놓은 응답이었을 것이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은 희망에 기대고 싶어진다. 오늘밤 이 땅에도 희망을 찾아 노래하려는 시인이 있을 것이다. 그가 좋은 시인이라면 그는 절망과 고통을 파고들 것이다. 운이 좋으면 그는 희망의 그림자가 언뜻 어른거리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pixabay

칠레 시인 세사르 바예호(César Vallejo, 1892~1932)의 유고시집에는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라는 긴 산문시가 실려 있다. 이 시는 제목과 달리 희망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줄곧 고통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오늘 이 고통을 세사르 바예호로 겪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로도, 인간으로도, 살아 있는 존재로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 신자, 이슬람교도, 무신론자로도 겪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고통 스러워할 뿐입니다. 내가 세사르 바예호가 아니었다 해도 이 고통을 겼었을 것입니다. (…) 오늘은 단지 고통을 겪을 뿐입니다.

 (중략)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아버지나 아들이 되어야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의 이 고통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밤이 되기에는 등이 부족하고 새벽이 되기에는 가슴이 남아돕니다. 그리고, 어두운 방에 두면 빛나지 않을 것이고, 밝은 방에 두면 그림자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지간에 오늘 나는 괴롭습니다. 오늘은 그저 괴로울 뿐입니다.

 -세사르 바예호,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고혜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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