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하루 전까지 놀고 싶다던 아이들
상태바
죽기 하루 전까지 놀고 싶다던 아이들
[제작기] KBS 성장다큐멘터리 ‘5월, 아이들’
  • 이승문 KBS 교양문화국 PD
  • 승인 2016.05.17 08:5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임종을 앞둔 현후의 다리를 아버지가 주물어주고 있다. ⓒKBS

방송 전날인 지난 3일 아침 여섯 시. 배우 송혜교와의 더빙이 잡혀있는 날이라 그런지 일찍부터 멀뚱멀뚱 깨있었다. 김민선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늘 그렇듯 차분한 목소리. "수진이가 조금 전 하늘나라에 갔어요." "네, 알겠습니다." 1월 14일부터 제작을 시작한 지 100일. 처음으로 통곡했다. 창밖엔 세찬 바람에 실린 비가 맘껏 날아다니고 있었다. 방안까지 공기가 서늘했다. 수진이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였다.

소아호스피스. 이 무서운 단어를 들은 건 2년 전이었다. <생명최전선>이라는 정규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서울대 어린이병원 소아응급실을 취재한 지 한 달 무렵. 그 작은 응급실에서 내가 목격한 건 그곳을 꽉 채운 ‘전혀 다른 삶’이었다. 수천가지 희귀병과 중증질환으로 아이들이 응급실에 들어왔다. 상황이 정말 응급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어디에도 머물 곳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병실이 겨우 생기면 ‘밀고 올라가는’ 걸 목표로 응급실에서 며칠 밤낮을 보내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 곁에서 24시간 의료행위를 하는 엄마들. 아이와 가족들은 완전히 혼자였다. 그들은 ‘사회’에 없었고, 그곳에 ‘사회’는 없었다.

새벽, 응급실 앞에서 한 교수님께 볼멘소리를 했더니 돌아온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외국에는 소아호스피스라는 게 있어요." 소아호스피스. 발가락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저릿한 느낌이 관통했다. 서울대 어린이병원 1층 응급실에서부터 8층 혈액종양병동까지, 여러 삶과의 만남이 그렇게 시작됐다. 2015년에 세 편, 2016년에 두 편, <5월, 아이들>을 제작하며 여덟 명의 아이들을 촬영했다. 그 중 다섯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둘은 입원해있고 한 명은 집에서 버텨내고 있다.

▲ 17살 수진이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집에서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KBS

수진이를 처음 만난 건 1월 셋째 주였다. 17살 수진이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집에서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김민선 교수의 가정방문을 따라가서 은근슬쩍 섭외를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바깥에서 멀뚱멀뚱 시간을 보내다 접견 허락이 떨어졌다. 언덕빼기에 자리한 집의 가장 아늑한 소파 위에서 한 소녀가 나를 의심어린 눈빛으로 올려보고 있었다. 나의 구멍 난 양말에 함께 실소하기 전까지 내 얼굴을 맴돌던 그녀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수진이는 자기에게 남은 인생에 어떠한 불필요한 것도 추가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검색대를 통과한 비결은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한참동안의 농담 끝에 수진이의 통제된 시간 속으로 초대받았다. 세상에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은 모두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언제 하고싶어질지는 본인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약속한 건 늘 병원에 있겠다는 것이었다. 내 ‘기획의도’가 아니라 나라는 인간을 설득시켜야했다. 모든 촬영은 아이들의 통제 하에서 이뤄졌다. 오늘은 피곤해요, 여기서는 안 찍었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들에 일일이 대들어 설득하지 않았다. 인터뷰 도중에 말을 멈추면 나도 멈췄다. 아이들이 나를 대등하게 느낀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이 짧은 생의 아주 잠시도 훼방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물러선 만큼 기다렸다. 안 피곤한 순간을. 말하고 싶은 순간을. 그 짧고도 기적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나의 최선이었다.

아이들 당사자의 목소리로 전달하고 싶었다. 소아완화의료-호스피스라는 의학적 정답을 근엄하게 던져주고 싶진 않았다. 더더군다나 부모들의 육성에 치우쳐 무너지는 감정으로 호소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이야긴 어차피 슬픈 이야기가 될 터였다. 지식이든 감정이든 촬영하기 전부터 답이 정해져있는 이야기는 결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증언과 상황, 그리고 이를 시종일관 바라보는 김민선 교수의 시선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짧은 삶을 묵묵히 기록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조금씩 흘러갔다.

▲ 국내 유일의 소아완화의료 전문의이다. 5만여 명의 희귀중증질환 어린이들과 매년 1300여 명의 임종 아동들을 돌볼 전문가가 국내에 전무한 셈이다. 그 곁을 김민선 교수는 지키고 있다. ⓒKBS

수진이를 촬영한 지 3주쯤 됐을 무렵, 수진이가 내리 사흘을 잤다. 잠이 많아지는 것은 대표적인 임종기 증상이었다. 나와 카메라감독은 아연실색했다. 촬영이 피곤했던 것이다. 현후는 첫 촬영한 다음날 너무 피곤해 혓바늘이 돋아 부모님께서 촬영 중단을 원하셨다. 아이들은 모두 한 시간 뒤를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물러서면 언젠가 아이들이 다시 카메라를 찾았다. 그건 할 말이 남아서기도 했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그저 조금 놀고 싶어서기도 했다. 나는 병원 어딘가에 계속 앉아있는 이동식 확성기야, 라는 말을 아이들이 믿어준 것이다.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독하다’는 답도 여려 번 점지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질문과 답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현장의 스태프들이 심리상담이라도 받을 수 있는 제작환경 변화를 도모하자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다만 가장 힘들고 처절한 순간에 자기의 모습을 공개키로 결심하고 심지어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숙지한 상태에서 지상파 방송에 출연한 아이들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곁에서 ‘견디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네 아이 중 세 아이가 떠났고 내가 확성기 노릇을 제대로 했는지는 모르겠다.

▲ 현후가 먹는 김을 이에 붙이며 개구진 표정으로 웃는 사진이 병상 벽면에 붙어있다. ⓒKBS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은 모두 김민선 교수에게 돌렸으면 한다. 국내 유일의 소아완화의료 전문의이다. 5만여 명의 희귀중증질환 어린이들과 매년 1300여 명의 임종 아동들을 돌볼 전문가가 국내에 전무한 셈이다. 수많은 아이들이 ‘꽤 오랫동안’ 이 사회의 일각에서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삶은 어른들보다 덜 아름답지 않다. 아니 또래의 어린이들처럼 그들의 하루하루도 부푼 가슴과 송글송글한 땀방울로 가득하다. 짧은 생의 마지막, 모든 가능성이 끝났다고 선고된 삶 속에서 다시 꿈틀꿈틀 카드놀이를 꺼내고 블록을 쌓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곁을 김민선 교수가 아직까진 버텨내고 있다.

수진이가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말 한마디는 미안하게도 방송에 나오진 않았다. 수진이는 “아픈 아이들도 이렇게 사는데 멀쩡한 사람들이 제발 멀쩡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멀쩡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방송이 되었길 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유빈 2016-08-15 13:15:22
정말 슬픈이야기 인것같다.부모님들도 엄청 마음이 아플것 같고,더욱더 힘내서 사시셨으면 좋겠다.앞으로도 화이팅하시고!!잘사세요.

주요기사
이슈포토